도하 와의 만남 첫번째
악마의 그놈
제1화 도화와의 만남
마계를 다스리는 마왕 루시퍼의 궁.
이곳이 이렇게 소란스러운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저를 농락한 에이몬을 벌하여 주십시오!”
“같은 마신끼리 이런 짓을 벌이다니,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끙.
루시퍼가 얼굴을 찡그리며 제 앞에 서있는 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마계의 왕 루시퍼가 가장 총애하는 악마. 루시퍼 휘하 11명의 마신 가운데서도 가장 가공할 능력을
지닌 마신. 그리고… 자타공인 마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 에이몬.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은빛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사내의 얼굴은 공들여 빚어놓은 조각상 같았다.
루비를 박아놓은 듯 반짝이는 붉은 색 눈은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으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표정 없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루시퍼가 입을 열었다.
“에이몬, 네가 정말 마르비타를 유혹한 것이 맞느냐?”“
제가 바로 그 현장에서 저 비열한 새끼를 잡아왔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거대한 덩치를 들썩거리며 바싸고가 소리쳤다.
11 마신 가운데 하나인 그는, 마신 마르비타의 연인이기도 했다.
불꽃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아름다운 마르비타. 잔뜩 흐트러진 차림에 화장기 없는 창백한 낯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한없이 청초하고 처연했다.
사실은 그녀가 잘생긴 남자라면 가리지 않고 제 것으로 만들어 야만 직성이 풀리는,
정욕과 질투의 화신이라는 것을 모두가 잊을 정도로.
그런 마르비타와 그녀 곁에서 어쩔 줄 모르는 바싸고를 바라보며 혀를 쯧 찬 에이몬이 비로소 대답했다.
“예, 제가 그리하였습니다.”
“마르비타를 유혹하면서, 허상을 만들어내는 네 능력을 사용한 것도 인정하느냐?”
“예, 인정합니다.”
“같은 마신을 상대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돼있다. 에이몬, 그것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그랬다. 그것은 오래 전, 바람을 관장하는 마신 배파르와 물을 다스리는 마신 크로셀이 서로의 능력이 더
강하다며 다툼을 벌이다 마계가 쑥대밭이 된 이후로 마계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 만들어진 법이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헌데도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이냐? 대체 왜…!”
마왕인 자신에게 고분고분하거나 아첨을 하기는커녕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하는 바른 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는 자.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서늘한 기운을 뿌리고 다니는 차갑고 아름다운 사내.
루시퍼는 그런 에이몬을 누구보다 신임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마르비타가 에이몬을 탐내고 유혹해왔지만,
에이몬은 눈 하나 꿈쩍한 적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을 더욱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에이몬, 이 개자식. 그래도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어떻게…!”
아무도 모를 것이다. 마르비타의 끈질긴 유혹에 눈길 한 번 준 적 없는 에이몬이, 오늘 벌인 일 역시도
사실 바싸고를 친구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러나 저를 죽일 듯 노려보는 바싸고에게도,
무슨 변명이든 해보라 몇 번이나 기회를 주는 루시퍼에게도 에이몬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린 듯 아름다운 에이몬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는 듯 서늘하고 고요하기만 했다.
“왜라니요? 왕이시여, 설마 잊으셨습니까? 본디 저는 불화와 파멸을 일으키는 자.
누군가의 마음속에 의심의 싹을 틔우고, 신의를 짓밟는 악마가 바로 저 에이몬인 것을요.
저는 그런 제 소임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루시퍼가 한숨을 내쉬었다. 속사정이야 어찌됐건 에이몬은 마계의 법을 어겼고,
자신은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할 마계의 왕이었다.
도무지 내키지 않는 입술이 무겁게 열렸다.
“마신 에이몬에 관한 마르비타와 바싸고의 처벌 요청을 받아들인다.
에이몬에게서 마신의 지위를 박탈하고 인간계로 추방하라!”
예상보다도 훨씬 엄중한 판결에, 좌중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간 자신의 소임에 충실했던 마신이 단 한 번의 실수를 했다고 해서 영영 내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일 터. 에이몬에게 기회를 주고자 한다.”
“……?”
“에이몬 네가 그토록 경멸하는 사랑과 신의라는 감정.
그것은 우리 악마들이 인간의 마음을 조종하고 장악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기도 하지.
그러니 진정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의 그 굳건한 마음을 깨뜨리고
그들의 믿음을 배신이라는 파멸로 이끄는 것만큼 악마다운 일도 없지 않겠느냐?”
“…….”
“단, 기한은 일 년. 그 안에 진정한 사랑 셋을 깨뜨릴 수 있다면
다시 마계로 돌아와 마신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잠시 말을 멈춘 루시퍼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실패할 경우, 에이몬은 다시는 마계로 돌아올 수 없다.
또한 마신으로서 지녔던 능력과 힘 역시 모두 잃게 될 것이다. 받아들이겠느냐?”
“……예, 받아들이겠습니다.”
“잊지 마라, 에이몬. 기한은 일 년뿐이다.”
그렇게 악마 에이몬은 마계에서 추방당했다. 자신의 운명이 어디로 향할지도 모른 채.
서울의 한 기자회견장.
최근 연예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스캔들을 취재하기 위해 많은 연예 매체 기자들이
포토라인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스캔들의 주인공은 단 두 편의 출연작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강도하.
데뷔작은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여주인공을 혼란에 빠트리는 나쁜 남자 역할이었지만,
독보적인 외모와 치명적인 분위기로 단숨에 대중의 눈을 사로잡았다.
남자 주인공을 뛰어넘는 폭발적인 인기에 결국 강도하와 여주인공이 이어지는 이야기로 드라마의
결말이 바뀔 정도였다.
그리고 곧바로 주연을 맡은 청춘 드라마 <스무 살의 순간>은 무려 20%라는 기록적인 시청률을 달성했다.
그러자 광고계의 러브콜이 쏟아졌고, 영화계까지 발 벗고 나서 캐스팅 전쟁을 벌이던 그때,
스캔들이 터졌다.
강도하와 함께 <스무 살의 순간>에 출연했고,
국민 여동생이라 불리는 여배우 김수지가 실연을 이유로 자살소동을 벌인 것이다.
상대는 다름 아닌 강도하였다.
김수지의 팬들은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한다면서 사귈 것을 요구했고,
뜻밖에 여론도 호의적이었지만 강도하의 반응은 냉담했다.
단 한 번도 김수지가 입원한 병원에 찾아가지 않았고,
그리고 오늘 이번 사건에 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겠다며 기자 회견을 연 것이다.
“저는 김수지씨와 결코 사귄 적이 없습니다.
모든 건 비즈니스였을 뿐입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김수지씨가 강도하씨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겁니까?”
“제가 알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요.”
“강도하씨 때문에 자살까지 시도했는데, 미안한 마음은 없습니까?”
잘생긴 강도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제가 뭘 했다고 미안해야 합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김수지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것은 저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사랑이 뭐라고 어린 나이에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게 좀 안타깝기는 하네요.”
기자 회견을 지켜본 김수지의 팬들은 분노했고,
강도하에게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어린 여배우를 농락한 무례하고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대중의 여론은 알 수 없는 법.
처음에는 비난의 댓글이 쇄도하는가 싶더니, 점차 강도하를 칭찬하는 글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김수지에게 들이 댔다가 대차게 차인 남자 아이돌의 극성팬들에게 강도하는 단칼에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를 처치한 히어로나 다름 없었다.
나쁜 남자에게 열광하는 여성 팬들은 강도하의 차가운 성격과 잘생긴 외모에 반해,
팬클럽까지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팬클럽의 이름은 ‘데블’,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악마처럼 매혹적인 남자라는 뜻이었다.
강도하가 표지 모델로 실린 잡지를 훑어보던 신대표가 신경질적으로 페이지를 덮었다.
“선우야. 네가 얘보다 부족한 게 뭐지?
나이도 어리고 외모도 뒤처질 게 없는데, 왜 누구는 망하고 누구는 잘되는 걸까?”
고급 승용차 뒷좌석에 몸을 기댄 신대표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전자담배가 유행이었지만,
그녀는 강렬한 것이 좋다며 연초를 고집하고 있었다.
하얀 담배에 붉은색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옆자리에 앉은 선우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지금 어떤 항변도 신대표의 귀에 들릴 리 없다는 걸 선우는 잘 알고 있었다.
신대표는 대답 없는 선우를 곁눈으로 흘기며 말했다.
“왜 가만히 있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이번 앨범은 꼭 성공할 테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탁.
신대표가 라이터의 불을 켰다. 답답하다는 표시였다.
선우는 신대표가 담배에 불이 붙는 모습을 응시하며 말했다.
“지난번 앨범은 운이 없었어요. 대표님도 잘 아시잖아요.
하필이면 저희 앨범 발매일과 B.O.S의 컴백일이 겹치는 바람에….”
신대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지금 내 탓을 하는 거야?”
당대 최고의 글로벌 아이돌과 컴백 날짜가 겹치는 불운을 그럼 내가 설계했단 말인가.
얼마든지 항변을 할 수도 있었지만, 선우는 터져 나오려는 불만을 애써 추슬렀다.
회사와의 불화는 그룹의 해체와 직결되는 일이었다.
비록 인기 없는 무명이었지만,
어쨌든 선우는 ‘에인젤’이란 보이밴드의 리더였다.
다른 멤버들의 운명이 자신의 한마디에 걸려있단 걸 선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리가요. 대표님이 저희한테 얼마나 신경써주시는지 제가 누구보다 잘 알죠.”
“그런데?”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지.
3집 앨범을 내기 위해선 어떻게든 신대표를 설득해야 했지만,
선우는 이 여우 같은 여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선우의 대답을 기다리던 신대표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저희가 이번 앨범 꼭 성공시킬게요.”
“이미 두 번이나 망한 앨범에 나더러 또 돈을 대라고?”
“삼세번이라고 하잖아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대표님이 시키시는 건 뭐든지 할게요.”
“뭐든지?”
신대표가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패기는 좋네.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요?”
“그렇게 노래가 하고 싶으면 너희 앨범 제작비용은 네가 직접 벌어.”
안 그래도 커다란 선우의 눈이 더욱 커졌다.
“제가요? 무슨 수로요?”
“광고 출연해.”
“광고요?”
“그렇지 않으면 에인젤은 해체될 거야.”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선우는 신대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강도하도 아니고, 이미 두 번이나 실패한 보이밴드의 리더를 어느 광고주가 받아준단 말인가.
이건 다음 앨범을 내주지 않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기회는 내가 주는 게 아니라 네가 잡아야 할 거야.
지금 우리가 가는 미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에인젤의 다음 앨범이 나올지 말지가 결정되겠지.”
신대표의 말에 선우는 이유 모를 불안이 엄습함을 느꼈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강남의 한 클럽 앞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연예인들의 집합소라 불리는 청담동.
그중에서도 클럽 헬은 방송과 영화, 모델, 광고업에 종사하는 제작자들의 비밀 아지트로 유명한 곳이었다.
어떻게든 그들의 눈에 띄어 데뷔하고 싶은 젊은이들이 한껏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매일 밤 이곳에 몰려들었다.
선우는 신대표의 뒤를 따라 사이키 조명이 번쩍이는 이 휘황찬란한 소돔 안으로 들어섰다.
웨이터들 역시 하나같이 모델 뺨치는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신대표가 나타나자 웨이터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신대표님, 오셨어요.”
“응. 자기. 못 보는 사이에 몸이 더 좋아졌는데?”
“캐스팅 건은 어떻게 되셨어요? 소식이 없어서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봐. 때가 되면 연락하지 않겠어?”
“제가 김 감독님과 대표님 연결해 드린 거 잊으신 건 아니죠?”
신대표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분명 짜증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웨이터를 대하는 그녀의 말투는 더없이 차분하고 상냥했다.
“잊을 리가 있나. 특별히 신경 쓰고 있으니까 곧 좋은 소식이 갈 거야.”
“그럼 대표님만 믿고 있을게요. 필요할 때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신대표는 대답 대신 웨이터의 탄력 있는 엉덩이를 가볍게 터치했다.
선우는 그의 눈빛이 성공에 대한 기대로 반짝이는 걸 보았다.
최근 연예계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남자 배우가 이곳 웨이터 출신이라는 소문이
그들을 더욱 들뜨게 했다.
웨이터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멀어지자, 신대표는 선우에게 물었다.
“여기 웨이터 경쟁률이 얼마인지 알아?”
“아니요.”
“무려 백 대 일이야. 선우가 얼마나 큰 행운을 거머쥔 건지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선우는 사실 행운 따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음악이 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아이돌이 되고, 어쩌다보니 예능에 출연하고,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생계형 아이돌은 선우의 다른 이름이었다.
신대표가 클럽 맨 안쪽에 있는 시크릿 룸의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벌컥.
안쪽에서 거칠게 문이 열렸다.
거기 소문으로만 듣던 강도하가 서 있었다.
파란색 니트에 찢어진 청바지를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그는 특별히 멋을 내지 않았는데도
클럽 안의 어떤 남자들보다 빛나 보였다.
후광이 비친다는 게 이런 건가.
넋을 놓고 바라보던 선우는 무심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경멸, 짜증, 무시.
인간이 인간에게 보낼 수 있는 모든 비난이 녀석의 연갈색 눈동자에 담겨있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나를 알지도 못하잖아.
그때 강도하가 던진 말이 선우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다.
“하…! 한심한 자식.”
악마의 그놈 1회 끝!
비회원